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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 독서

시계태엽 오렌지 - 앤서니 버지스

오랜만에 보면서 기분이 이상한 책이었다.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을 때도 그랬고, 시계태엽 오렌지를 읽을 때도 비슷한 느낌이었다.

스스로를 통제하지 못하고 무계획성을 보이는 캐릭터를 약간 증오하나보다.

누구나 그런 기질(마구잡이로 살고싶은)을 약간은 가지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나는 그런것들을 혐오하도록 자라온 듯 하다.

‘스톡홀름 증후군’이라는게 있다. 범죄자를 보다보면 범죄자에게 온정이나 동정을 느끼게 되는 증후군인데, 책이나 영화를 읽어도 주인공이 매력적일때 그런 감정을 느낀다.

‘친구’나 ‘타짜’의 주인공은 사실 나쁜짓(도박, 건달)을 하는 주인공인데 가까이서 바라보다보면 내 일인 것 처럼 느껴져 손에 땀을쥐고 ‘잡히지 않았으면..’하는 마음이 일곤한다.

허나, 시계태엽 오렌지는 그런 느낌이 하나도 들지 않았다.

적어도 나에 대해서는 작가가 힘조절을 잘 못한듯 하다.

일전에 캐나다에서 같이 일했던 누님과 마약중독자를 어떻게 해야하는가 이야기 한 적이 있다.

나는 오염은 확산된다고 생각하는 주의이기에(약간 위험한 생각일 수 있지만) 그들을 수용하는 시설이 필요하고 격리를 통해서 다른 사람들이 빠지지 않을 환경을 만들고 그들 스스로도 격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그 누님은 누구나 그렇게 될 수 있기 때문에 그래서는 안되며 그들이 사회에 녹아들 수 있도록 사회 내에서 회복시켜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은 후자에 가깝지 않았나 싶다.

주인공은 뇌 수술(세뇌에 가까운)을 받고나서 악행을 저지를 수 없게 됐고 고통에 몸부림치다가, 사고를 통해서 원래 상태로 돌아왔는데 같이 놀던 패거리들은 다 철이 들어버렸고, 본인도 어느순간 철이 들어버리는 이야기다.

철이 든다거나 선행을 한다고 해서 이미 저지른 악행이 없어지지는 않는다.

선과 악은 x축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벡터선상에 놓여있다.

소설이 끝나는 마지막 장까지 나는 주인공이 회개했을 때 가장 불행하기를 바랬다.

 

하지만 그때 당시의 도덕상과 현재의 도덕상을 보는 재미도 있었다. 지금 보면 정말 무법지대가 따로 없다. 

동명의 스탠리 큐브릭의 영화가 있다. '스페이스 오디세이' 를 본 이후로 정말 좋아하는 감독이기 때문에 조만간 시각적으로 어떻게 이 분위기를 풀어냈는지 한번 보았으면 좋겠다.(취업을 한다면...)